현재 한국 미술 판 내, 당신의 위치에서 한국미술을 바라보는 문제적 시선은?

황석권 월간미술 수석기자
동시대 한국 미술을 바라보는 짧은 시선들
최근 현장에서 만나는 이들과 나누었던 대화나 잡지에 들어갈 원고를 청탁하여 받아본 글 등에서는 비슷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으로 상징되는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SNS’) 등에서 회자되는 문장과 관련한 언급이 꽤 많이 늘었다는 점이다. 모바일 디바이스(device)의 대중화로 인해 계정만 있으면 통신서비스가 가능한 지역 어디서나 SNS에 접근, 남의 의견을 듣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가능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그들의 발언이나 생각을 실시간으로 전해듣고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또 하나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또한 그들에 대해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어버린 느낌이다.대부분 SNS를 통해 개진되는 의견들은 일종의 선언문(declaration)이나 정의(definition)와 같은 문체를 띠고 있다. 현상과 이슈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를 감지하게 만드는 이같은 일련의 경향은 SNS가 사적공간이냐 공적공간이냐하는 문제와 결부되어 다양한 논란거리를 낳는다. SNS의 특징인 파급력과 전파의 속도가 다양한 의견을 낳고 그것을 수렴하거나 비평, 혹은 논의의 대상이 되는 과정을보면그자체로담론을구성하거나말에말을더하는것이상의의미를 갖기 힘들다고 보여지기도 하는 등 다양하게 받아들여진다.이번 <무빙트리엔날레>에 참여하면서 이런 이유에 대해 나름 궁금하던 것을 알아보고자 했다. 스스로는 SNS에서 타인의 발언을 듣고만 있는 입장에 있어 그것에 대해 나의 의견을 개진한 적은 없다. 스스로를 듣는 입장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태도의 변화가 궁금했다.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사적공간이라 생각하는 트위터너 페이스북에 올리는 글과 그들의 원고와 그들의 발화의 차이점을 생각해 보고 싶었다.10명의 비평가, 작가, 그리고 큐레이터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무빙트리엔날레>에서 나에게 제안한 내용과 더불어 그것을 가공해 내가 듣고 싶어하는 대답으로 이어갔다. 그것은 아래와 같다.<무빙트리엔날레>의 기회 취지와 더불어 나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같은 매체를 통해 발언하는 것과 같이 자유로운-물론 자기 검열은 일부 작동하겠으나-발언을 듣고자 함”이라는 좀 거칠고 세세하지 못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질문은 한 가지 입니다.
“지금, 바로 당신의 미술판 내에서의 위치에서 한국미술을 바라보는 어떠한 시선도 좋습니다. 문제점을 지적해 주셔도 좋고, 아니면 감상적인 평도 좋고, 풍경을 바라보는 관조적 시선도 좋습니다.
위에서 제시한 기획의도를 바탕으로 생각해주셔도 좋습니다. 앞으로의 예상되는 모습도 좋습니다. 화났던 이슈나 기분좋았던 이슈, 치열하게 고민하셨던 이슈 등도 좋습니다.
지금 당신께서 생각하시는 한국미술에 대한 한 마디만 부탁드립니다.그것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결론으로서 그들의 원고를 평가하지는 않겠다.
다만 만약 이것이 SNS라는 공간에서 게재되었을 때, 그 차이점을 상상해보자는 것이 이번 <무빙트리엔날레>를 참여하는 나의 의도다.
현재 한국 미술 판 내, 당신의 위치에서 한국미술을 바라보는 문제적 시선은?
김재환
경남도립미술관 학예연구사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해 부산비엔날레가 막 생겼을 즈음, 비엔날레는 담론을 생산하는 국제적인 미술행사로 컨템퍼러리 아트의 첨단(?)을 보여주는 순기능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대규모 미술행사는 자본이 자본의 증식에만 매몰되듯 자신의 몸짓을 키우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분위기이다. 미술계의 새로운 담론을 창출하고 건강한 움직임을 생산하려는 의지는 사라지고 자신의 이익을 충족하거나 조직을 공고히 하는 욕망만이 보일 뿐이다. 부산비엔날레는 오광수위원장의 전횡으로 보이콧 운동이 일어났으며, 광주비엔날레는 광주정신을 되살리는 특별전에서 대통령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작품 설치가 유보되고 특별전 총감독이 사퇴하는 파행이 발생했다. 개인적인 욕심 같아서는 이제 비엔날레 따위의 행사는 없어지면 좋겠다. 미술작가나 기획자가 일상적 터전에서 꿈틀거리는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문화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라도 쓸 데 없이 덩치 큰 이런 행사는 사라져야한다.
고산금
작가
그대여 어디 있는가?
진실과 정의 말하지 말라 하지 않았는가. 있는 그대로 우리의 모습을 그려나가라.
역사의 흐름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것이라 하였음을 기억하라.
이미 문자에서 이미지로 전환된 시대, 이야기 꺼리로 시각화하는 것이 무슨 대술꼬.
사람들아 소리쳐 말하노니 예술가는 한량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의 삶 문화 정치 경제를 바라보고 기록하는, 삶의 조력자이니
밖의 소리가 시끄럽고 예술가의 내면이 어지러워도 걱정하지 말라. 너의 몫은 힘들어도 그 자리를 지키는 것.
양지윤
코너아트스페이스 디렉터, 미메시스 아트뮤지엄 큐레이터
한국현대미술계는 상반하는 미학적 개념과 예술적 실험들이 혼재된 상태 화이트 큐브 갤러리와 블랙박스 공연장, 그 경계를 넘나드는 다원예술, 거대 예산이 투입되는 국제 비엔날레와 국가 지원 없이는 생존이 힘든 대안공간, 널뛰는 예술시장과 여전히 배고픈 실험예술, 번역되는 서구 담론과 갱신하는 아시아 미학, 국가 정책으로 삼은 ‘창조경제’와 경제적 가치를 입증해야 하는 순수예술.
강현욱 
작가
친구가 질문했다!
현대미술이 뭐냐고? 그리고 예술은 사기인가! 하며 질문을 했다. 난 듣기 싫었다. 사기 보단 마술에서 보이는 트릭이라 말했다. 그 당시 난 감정 싸움에 지쳐 버렸다. 작업은 그 시대를 관객에게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역사를 인지시키는 지에 대한 문제 이다. 하여 미술은 대중의 공감을 꼭 요하지 않는다. 또한 작가가 아무리 미천하게 보이려 하고 외쳐도 미술의 안에 있는 한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을 것이다.
신혜영
비평
오늘날 미술 혹은 예술이 뛰어난 몇몇 천재의 소산이라거나 세상과 분리된 신성한 무엇이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결국 미술도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인간이 자신의 능력과 시간을 투자해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그 결과물에 합당한 대가와 인정을 받아 유지되는 일종의 ‘생산의 영역’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우리나라 ‘미술생산장’ 안에서 결과물에 합당한 대가와 인정의 ‘시스템’ 이 확고히 자리잡지 못한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대가와 인정’ 은 생산장 밖의 구매자나 대중이 바라보는 예술가의 지위나 예술작품의 가치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생산장 안에 몸담고 있는 직접적 생산자인 예술가들과 예술작품을 매개하는 전시기획 및 판매, 언론 등과 관련된 간접적 생산자로서의 수많은 매개자들 스스로 생각하는 ‘대가와 인정’ 에 대한 인식수준에 관한 문제이다.
최근 몇몇 전시의 주제로서, 또 특정 전시의 진행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담론으로서 ‘노동가로서의 예술가’ 에 관한 문제가 논의된 바 있다. 구체적으로 작가의 작품제작비 지급이나 필자의 원고료 지급과 같은 부분들이 될 것이다. 미술생산장의 구조적 특성 상 극히 일부 작가들만이 작품을 팔아 생활이 가능하고, 대부분의 작가들은 공적∙사적 후원이나 복수의 직업을 통해 어렵게 생활을 영위한다. 필자 역시 교수나 기관에 속한 큐레이터가 아닌 이상 얼마 되지 않는 원고료나 강의료로 생활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미술생산장은 자신들이 생산한 결과물에 대한 매우 기본적인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작품제작비나 원고료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미비하다. 전시의 경우 할당된 전시비용이 얼마가 되었건 지출 항목에 기본적으로 ‘작품제작비’ 가 책정되어야 하며, 원고의 경우 원고분량이나 필자의 지위와 무관하게 기본적인 ‘원고료’ 가 지급되어야 할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주장에 “어차피 예술이 명성을 얻기 위한 것 아니냐” 혹은 “당신은 금전적인 보상 대신 이름을 알렸고 인정을 받은 거 아니냐”고 말할지 모르겠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예술이 다른 생산영역에서보다 명예와 인정이라는 상징자본을 중요시하고, 상징자본이 결국 실질적인 자본으로 치환되는 특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제작비나 원고료와 같은 기본적인 대가는 그러한 상징자본과는 별도로 지급되어야 하는 매우 직접적인 비용이다. 이러한 사실을 간과할 때 우리 미술계는 일부 유명 작가와 필자만이 독식하는 불균형적인 구조를 면하지 못할 것이며, 작품과 비평이라는 생산물의 질적 발전도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물론 전시비용이나 원고료를 책정하는 것은 대부분 기관의 수장이나 관리자의 일이다. 그러나 생산장 내 행위자들 스스로 인식을 바꾸고 계속해서 담론화 해나가지 않으면 변화의 가능성은 전무할지 모른다. 스스로 비굴한 ‘을’ 의 자리를 자처하지 말자. 우리 스스로 떳떳한 ‘을’의 자리를 요구할 때 비로소 진정한 ‘갑’이 될 것이다.
문혜진
비평
최근 1990년대 초반의 미술계를 살펴보면서 한국미술에서 동시대성의 의미에 대해 번민하게 된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났건만 오늘날의 한국미술은 중심-주변의 논리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지역성, 타자성, 얼터모던 등 대안으로 부상하는 담론은 여전히 서구산이고, 서구의 유력 기관에서 전시/수상한 한국인 작가의 소식은 아직도 쾌거다. 우리에게 동시대성이 서구와의 시차를 배제시킬 수 없는 문제라면, 차라리 가능성은 원본을 어떻게 다시 쓰느냐의 문화번역에 있을 것이다.
안경화
큐레이터(백남준 아트센터)

우리 사회도, 미술계도 양적인 성장 정책을 멈추고 현재의 상황을 점검하며 내실을 다져야하는 시기이다.미술관 건물을 짓는 것만을 목표로 하지 말고 미술관 속에 무엇을, 어떻게 담아낼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미술관을 이끌어가는 대다수 인력들의 불안정한 고용 상태를 개선해나갈 방법도 모색해야 한다. 사회도, 문화도 ‘사람’ 이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은 요즘이다.
윤성지
작가

작가로서의 나는 지금 유머를 잃고 있다.
풍자, 유머, 위트, 패러독스 등등 가볍거나 무겁거나 이 요소들은 내 작업의 키워드가 되어 왔다.
그러나 2014년 지금, 내 유머는 총총히 생기 있지도 날카롭지도 못하다.
세월호의 가라 앉음과 함께 나의 유머도 가라 앉았다.
“Sinking”, 그것이 생활인 그리고 작가로서의 근래의 내 모습이다.
시스템에 의한 인류는 이대로 절망적이기만 한 걸까.
유머를 잃어버린 나의 아트는 과연 컴백 가능한가.
조광용
비평

미술(혹은 예술)은 하나의 이미지나 시간의 축적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낯설음이며, 일탈이다.
나침반이 없기에 앞을 예측할 수 없는……그것은 혼돈과도 같지만 우리를 끊임없이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나, 기획자나, 평론가나 관람자나 미술(혹은 예술)과 관련된 행위들은 낯선 것이다. 미술의 행위가 익숙하게 느낄 때 그것은 일상의 행위이다. 우리는 일상의 행위를 미술의 행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